살을 애는 추위가 이어지다 영하권을 벗어나자마자 좀 살만하다 싶기도 한 날들이 이어집니다. 한파가 한 번 더 들이닥치면 봄이 온다고 하던데 믿을 수가 없어요.
저는 잠시 동굴에 다녀왔습니다. 물론 진짜 동굴을 간 건 아니고, 마음의 동굴이었어요. 생각보다 길어지는 취준은 어떻게든 버텨보겠는데 나를 찾는 곳이 없다는 생각에 자기효능감이 팍팍 떨어졌거든요. 지금 거주하고 있는 집은 청년주택인데, 벌써 이 집에서 지낸 시간이 훌쩍 흘러 재계약을 할 시기가 됐어요. 그런데 무소득자는 준비할 서류가 엄청나게 많아지더라고요. 부/모의 각종 재산 확인 서류부터 재직 증명서, 회사의 직인이 들어간 서류들… 계속해서 부모님과 통화하며 보완자료, 보완자료, 그리고 또다시 추가 서류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좀 위축이 되었던 것 같아요. 직장인이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하는 굴절된 사고를 하는 거죠. 모든 핑계를 스스로에게 돌리게 되는거죠. 물론 그만둔 것에 후회는 없지만…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또다시 관두겠지만.. 그래도 갈 곳이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 좀 울적해지는 날들이었어요. 당연히 비어가는 통장 잔고가 그 울적함에 가장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돈이 없다면, 벌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았어요. 우선 알바를 시작하기엔 취준 중이니, 면접을 가기도 힘들고, 덜컥 직장에 합격해 버리기라도 한다면 (김칫국) 민폐가 될 테니 힘들고. 직장을 구하진 못했고… 그렇게 생각하니 일용노동직에 눈이 가더라고요. 지난 몇 년. 촬영일로 짬을 채운 스스로의 체력과 겪어온 수십번의 상하차를 떠올려보니 할 만 하겠다 싶었거든요.
그렇다면 이제 어디에서 노동하느냐의 문제가 있겠죠.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역시 쿠팡이었습니다. 사실 노동 환경 문제와 소비 조장, 택배 산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문제에서 쿠팡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어 저는 쿠팡을 불매하고 있는데요. 그런 쿠팡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려니 고민이 되더라고요. 이게 맞나,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어쩌겠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갔다 와서 작은 현찰을 손에 쥐고 더 욕해주리라 하고 신청서를 타닥타닥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름, 전화번호, 동의합니다, 동의합니다, 동의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의 자아효능감을 더 떨어뜨리는 사태가 발생해요. 계속되는 쿠팡 탈락이었습니다. 인터넷 보면 돈 없다는 사람들한테 멸시를 담아 ‘쿠팡이나 가라’고들 하던데 쿠팡에서도 안 받아주는데 우짭니까? 심지어 저는 저의 체력을 고민해서 징검다리로 신청해 뒀는데 어느 징검다리도 제가 밟을 곳이 없더라고요.
그렇게 일용노동직의 기회를 얻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하던 어느 날, 갑자기 카톡 하나가 옵니다. 00캠프 심야 근무 긴급 Open.이라고요. 급하게 추가 인원을 받는다는 얘기였는데 저는 요즘 자기효능감과 자존감 높이기에 집착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어딘가에 합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자마자 불나방처럼 ‘가겠습니다’라고 답해버린 거예요. 그렇게 온라인 안전교육을 이수하고 밤 12시, 셔틀을 타고 캠프로 이동했습니다.
제가 일했던 파트는 ‘소분’이라는 파트였는데요. 송장을 보면 nnn-nnn이라고 적혀있는데 가장 앞 n이 지역을 의미하고 그 뒤의 nn은 조금 더 자세한 주소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도시/동 순서인 거죠. 지역구 대분류를 거쳐 온 택배들을 다시 동네별로 나누고 넘기면 그 택배들이 기사님의 차량에 실리게 됩니다.
이날은 소포장 된 택배가 토트박스라고 불리는 바구니에 담겨서 제 자리로 쌓이는데, 이걸 뒷 번호에 맞춰 분류하는 작업을 했어요.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가장 무거운 것이 세제였다는 정도인데, 그날 짧은 근무시간 동안 제가 평생 쓸 세제를 다 본 것 같았어요. 한국 사람들은 세제를 먹고 사나 싶을 만큼 세제가 많이 들어오더라고요.
수 시간 동안 들어온 택배들을 분류하고 넘기고, 분류하고 넘기다 보면 생각보단 할 만하긴 한데, 어느 순간엔 기계의 일부가 된 것 같은 기묘한 체감을 하게 돼요. 그리고 속도가 나지 않으면 방송으로 인력 붙여줘라, 몇번대 속도 더 내달라는 안내가 나오기도 하고 어떤 베테랑분들은 신입에게 열심히 꼽을 줘가며 일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컨베이어벨트가 컨베이어벨트에게 더 속도를 내라고 말하는 것 같아 좀 웃긴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건 끝이 없는 노동이거든요. 쿠팡의 물건은 끝나지 않는걸요.
여하튼, 그렇게 첫 경험의 후기는 ’허리는 다소 아프지만, 할만하다.‘ 였습니다. 새벽 1시 30분 - 오전 09시까지 근무라 생체리듬이 깨진다는 것 외엔 못 할 일은 아니다, 정도. 지난 n년 간의 경험이 나를 정말 강하게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사뭇 다시 하며… 그렇게 저는 또다시 쿠팡행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다음 주… 이번에는 저녁 시간 (18시 - 01시 30분) 근무에 붙었는데 이 시간대가 정말 뽑히지 않더라고요. 아무래도 지원 인원이 많은 시간대라 그런 것 같았어요. 여기는 정말 한.. 6-7번 떨어진 것 같은데… 겨울이라 여름보다는 근무 환경이 괜찮고 방학이라 대학생들 지원도 많아서 합격(?)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출근 위치가 저번과 달라 업무가 바뀌나 했는데. 시작 10분 후. 저는 약간 후회하게 됩니다. 이번에도 업무 자체는 비슷했는데 심야 때의 근무가 소포장 된 택배를 다뤘다면 이번에는 박스류까지 포함해서 분류해야 했어요. 그러니까… 쌀/음료/쿠팡 프레시박스 등등 구분 없이 모두 제 앞으로 오는 거죠. 지난 업무는 토트박스들을 옮겨주는 인력이 있어서 제 앞에 도착하는 박스를 하나씩 없애면 됐는데, 이번엔 컨베이어벨트에서 끊임없이 물건들이 넘어오는 바람에 속도가 조금이라도 떨어지거나 물량이 한 번에 몰리게 되면 컨베이어벨트 아래로 끝없이 물건이 떨어지고, 그래도 컨베이어벨트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물건을 토해내요. 끝없이 끝없이…
이전 업무 때는 그래도 한 6시간 정도 지나니 허리가 뻐근하더니 이번엔 시작한 지 1시간 만에 허리에 무리를 느낄 정도였어요. 계속해서 물건을 옮기다 보면 정말 작고 가벼운 소포장 택배부터 햇반 수십 개를 한 집에서 시키기도. 음료를 종류별로 시키는 사람도 있다는 걸 보게 돼요. 합배송보다 개별포장이 품이 덜 드니 같은 물품을 여러 개 시켜도, 같은 송장이 붙어도. 택배의 개수는 늘어납니다.
그리고 이 공장을 들여다보면 기계 설비가 보완되면 사실 이 공장에는 사람이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컨베이어벨트가 수십 개 추가돼야 하겠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죽는 사람 없이 공장을 돌릴 수 있을거란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러지 않는 이유는, 목숨이 설비보다 조금 더 저렴하기 때문이겠죠.
목숨값. 이라고 하는 게 뭘까요?
노동자의 목숨값은 왜 저렴하게 취급될까요? 어떤 해고노동자들은 복직 투쟁을 몇 년째 해도 갈 곳이 없고, 어떤 투쟁 그룹을 아는 것만으로도 어디선가 배제를 당하기도 합니다. 여름의 쿠팡은 목숨이 위태로우나 에어컨은 없어요. 다만 물은 나눠주죠. 겨울엔 제공되지 않는 우스운 여름 복지입니다.
이렇게 발달한 문명세계인데, 이 폭주하는 컨베이어벨트를 보고 있으면 이 컨베이어벨트는 어디로 향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끝없이 몰려드는 수만 개의 물건들. 인공적으로 생산되고 썩지 않는 것들. 끝도 한도 없는 비닐과 플라스틱. 쓰레기와 쓰레기들.
하루 동안 만나는 포장재들만 해도 썩는 데 얼마나 걸릴지 감도 오지 않아요. 그 순간 이 문장이 머리를 스쳐 갔습니다.
와라, 우리 문명은 이미 자구력을 잃었다.
<삼체> 속 대사입니다. 드디어 삼체를 봤는데 극의 재미와 별개로 보는 내내 가슴이 답답하고 저 문장이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더라고요. 아마 계속계속 생각할 것 같아요.
“와라, 우리. 문명은 이미 자구력을 잃었다.” 그러니까 지구는 이미 자정 능력을 잃고 재생할 가능성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마의 1.5도를 넘겼고 온난화는 가속되겠죠. 사실 지구는 죽지 않아요. 인류의 끝이 다가올 뿐이겠지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식민주의와 지구. 끝없는 소비 조장의 세계 속에서 삼체는 덩그러니 길 잃은 우리를 바라보게 합니다.
<삼체> 속에서는 이 자구력을 잃은 인간이 지배한 지구를 새로 변혁하고자 하는 무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구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대립해요. 적들과, 그 적들에 대항하는 적들이 가득합니다. 누가 적인지, 무엇이 적들의 행위인지도 알 수 없지만 계속해서 적을 미워하며 싸울 준비를 해요. 그 값으로 몇백, 몇천의 목숨이 들더라도 그건 필요한 것이라고 믿으며 죽음을 용인합니다. 그러니까 눈앞에 존재하는지 아닌지 아직 실체화되지 않은 적을 위해 실체가 있는 죽음을 용인하는 거죠.
다시 한번 이 문명은 자구력을 잃은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서 희생되는 건 사람의 목숨만이 아닙니다. 사실 가장 덜 희생되는 게 사람의 목숨이죠. 식물, 동물들은 끝없이 멸종합니다. 눈앞에서 보이지만 보지 않아요. 가끔 눈에 보이더라도 그게 자연의 법칙이라는 우스운 말로 그 죽음들을 모르는 체 하죠.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삼체> 이야기일까요, 지금의 지구 이야기일까요?
요즘 그런 생각을 해요.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짧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요. 실시간으로 지구가 무너지는 걸 체감합니다. 아마 몇십 년 뒤엔 커피도 초콜렛도 아주 고위층만이 즐기는 제품이 되겠죠. 원두값은 지금도 빠르게 오르고 있어요. 커피를 좋아하는데 원두를 살 때 손이 살짝 떨립니다. 몇 개월 만에 3-4천 원씩 오르는 걸 보고 있노라면… 10년 후, 20년 후의 아찔한 미래를 그리게 됩니다.
끝없는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오는 수십만 개의 물량, 별표가 붙은 송장은 새벽배송이니 꼭 따로 뺄 것, 작업이 마무리되면 그 롤테이너를 밀고 상차지로 옮길 것, 그러면 기사님들은 그 물건들을 새벽부터 나르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상하지 않나요? 어째서 오늘 시킨 것을 내일 받아야만 할까요? 서울은 특히 마트도 많고, 구매의 접근성이 좋은데도 물건이 계속 들어와요. 몸이 불편하거나, 나갈 수 없는 사람들일까 하고 생각해 보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많은 물건이 들어와요. 끝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의 소음을 듣고 있다 보면 그게 공장의 심장소리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덜컹 덜컹, 챠르르르, 쿵 쿵. 괴물의 입속에 들어와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삼체 속 누군가는 지구를 포기하고, 또 누군가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아득바득 노력합니다. 저는 이 두 부류가 골고루 섞여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인간이 너무 미운 동시에 지구를 정말 지켜내고 싶어요. 개인의 노력보다는 자본주의와 소비주의를 변혁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만…
완벽한 채식주의자 1명보다는 일주일에 한 번 채식하는 사람 10명이 지구에는 더 도움이 된다고 해요. 저 역시 고기를 소비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클린한 식탁을 챙겨보려 합니다. 덧붙여 음식을 버리지 않기를 가장 노력하고 있습니다. 냉장고에 들어간 음식물은 최고의 음식물처리기 인간의 위장으로 모두 보내기를 목표로 노력하고 있어요.
배달시키지 않기, 근처 마트에 장바구니를 들고 가 장보기, 먹을 만큼만 요리하기, 가까운 거리는 가능한 한 걸어보기. 그런 것들이 제가 일상에서 이루고자 노력하는 것들이에요. 쉽지는 않습니다. 특히 손이 큰데 입이 짧은 편이라 음식을 적정량만 하는 게 너무 어렵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신경 쓰는 것이 신경 쓰지 않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하는 맘으로요.
우리 문명은 자구력을 잃었지만, 우리 문명에서도 자구력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애써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