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사뭇 추워집니다. 이제 겨울인가 싶다가도 이제야 겨울 냄새가 나는 게 새삼 지구가 엉망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은 아니지만 11월의 끝자락에도 반팔에 후드집업 하나로도 거뜬하다는 게 놀랍습니다. (이 도입부를 쓴 게 지난주인데 이번 주는 살이 애리게 춥습니다. 지구가 정말 아픈가 봐요.)
저는 요즘 면허를 따기 위한 혼자만의 전투 중입니다. 요즘은 시뮬레이션 학원도 엄청나게 잘 되어 있다고 해 시뮬레이션 학원에 다니고 있어요. 학원에 들어가면 게임방 머신처럼 생긴 기계들이 몇 대 놓여있는데, 자동차 운전석만 똑 떼다 붙여두고 3개의 모니터 화면으로 차창을 구현해 두었습니다. 낯선 환경이지만 그래도 운전석은 아주 똑 떼와서 핸들, 방향지시등, 기어 등등 다 똑같아 어찌저찌 적응하게 됩니다.
왜 하필 시뮬레이션 학원이었냐고 묻는다면 첫째로는 가격이 좀 저렴하고, 둘째로는 저는 불안형 인간이라 혹시라도 사고를 내면 어쩌냐는 생각을 매일매일 하기 때문입니다. 시뮬레이션 세상 속에서는 연석을 들이받아도, 중앙선을 침범해도, 전복 사고가 나도 괜찮습니다. 화면에 뜬 빨간 ‘실.격’ 두 글자가 저를 속상하게 만들지만 그뿐이에요. 아무도 다치는 사람이 없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이렇게 운전하고 살고 싶어요.
물론 실제 차가 아니다 보니 기능을 치러 갔을 때는 굉장히 쫄았답니다. 그렇게 학원에 출석하고도 시동을 걸자마자 너무 진동이 커서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지을 만큼요. 너무나도 완만하고 야트막한 경사인데도 차가 뒤로 너무 쏠리는 게 아닌지 등줄기에 땀을 흘릴 만큼… 그렇게 쫄았습니다. 기능 시험의 합격률이 20%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계세요? 저는 역시 80%에 속한 사람이었던 건지 첫 기능을 시원하게 말아먹었습니다. 첫 좌회전을 하자마자 탈락했거든요. ‘0000번, 실격입니다.’라는 멘트를 장내에 가득 차게 방송하시더라고요. 민망하게… 연습과 비슷하게 핸들을 돌렸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급하게 돌렸는지 차가 중앙선을 밟아버렸고 거기서 탈선 1회, 다시 차를 똑바로 가다듬다가 또다시 실선을 밟아 그대로 점수 미달 실격. ‘하지만 원래 한국인은 삼세판이니까… 사실 나는 오늘 처음 운전석에 앉아본 것이니까…’ 하고 재시험 접수를 하러 갔는데. 이럴수가. 3일 뒤에나 시험이 가능하더라고요. 당연히 한 번에 붙겠거니 하고 하나도 알아보지 않은 저는 입술을 한껏 삐죽대며 그렇게 재수를 거쳐… 삼수까지 하고 합격했습니다. 재수 탈락은 좀 억울한 게 앞차에 이슈가 있었는데… 물론 제 잘못이지만 좀 아깝게 떨어졌어요. 무사히 세 번째 기능은 100점으로 깔끔하게 합격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도로 주행 연습 중이에요. 물론 여전히 시뮬레이션이라 통해 길을 외우고 기본적인 주행 연습 정도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번 주말에 내려가서 실제 차로 공터에서 연습을 해보려고 합니다. 전 차선 변경이 너무 어렵고 밉고 싫어요. 그냥 세상에 모든 길이 한붓그리기 게임처럼 한 길로 돼 있었으면 좋겠어요. 매일 울먹이면서 연습 중입니다. 실제 도로로 어떻게 나가나 싶어요. 그런데 사람이 웃긴 게 시험장의 a~d 코스를 숙지하고 나니 그때부터는 학원에서 틀어둔 노래 같은 것들이 드디어 들리기 시작하더라고요. 평소엔 탑 100 노래가 나오는데 가끔 정말 너무 신나는 노래가 나오거든요. 이정현의 와 라거나, 비비의 하늘땅별땅, 서주경의 당돌한여자 같은 노래들이나오는데 이럴 때마다 흥을 가라앉히는 게 쉽지 않습니다. 아직 저의 주행 짬바는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노래에 흥이 오르면 그 순간 차량이 비틀거리게 돼요. 이게 집중력을 키워주게 하려는 학원의 의도인 건지, 그냥 학원 선생님의 취향인 건지 궁금해하며 핸들을 다시금 잡습니다.
주말에는 본가에 내려가서 실제로 차를 몰아보고 올라왔어요. ‘월간독순’은 격주 월요일에 발송해왔는데 이번에는 본가에 내려가게 되면서 발송 일자가 평소랑 달라졌어요. 사실 이번 주 수요일로 주행 시험을 예약해뒀는데 갑작스러운 첫눈 소식에 급하게 시험 일자를 변경했습니다. 이번 편지에서 제 면허 취득 일대기를 담아보려 했는데 그 결과는 다음 편지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공터에서 좌회전과 우회전, 유턴을 연습하고 차가 한 대도 없는 시골길을 거북이처럼 쏘다니다 시골에서의 운전 연수를 마쳤습니다. 평소라면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을 했을 버스 안에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고속도로를 바라보며 ‘내가 언젠가 100km로 달리게 될까…’ 하는 생각으로 한숨을 폭폭 내쉬며 서울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비도 아니고 눈이라니요. 눈 예보를 듣고 눈을 뜨니 하얀 세상이 저를 반기고 있었습니다. 정말 시험을 잘 미뤘다 싶은 아침이었어요.
부산 출신인 저는 눈이 아직도 낯설어요. 일산에 있는 회사에 다닐 때는 다같이 제설하는 게 그렇게 기뻤어요. 눈이 치울 만큼 많이 내린다니! 갑작스러운 폭설에 가까운 눈을 보며 이 고요한 아름다움에 감탄하다가 새삼 이 날씨에 운전하는 모든 운전자에 대한 경탄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최근에는 이런저런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드라마건 영화건 보면서 운전하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아요. 면허도 없는 사람들이 운전대를 능숙하게 잡는 모습을 보면서는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렇게도 잘…’ 하는 감탄과 질투를 내뱉게 되고요, 추격전이 나오면 ‘저 도로에 초보운전자가 있으면 얼마나 무서울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이번 편지는 어떤 영화로 이야기를 나눌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학원에서 흘러나온 ‘favorite things’를 듣다 <사운드 오브 뮤직>를 간만에 틀고 몇 문단 썼다가 지우고, 시뮬레이션 운전을 하는 모습이 나오는 <블랙팬서> 시리즈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지 고민하다가, 난폭 운전자가 첫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일본 드라마 <miu404> 얘기를 썼다 지우기도 했는데 막상 꽂히는 작품이 없더라고요.
차량 추격 장면이 나오는 영화들은 정말 많잖아요. 바로 머릿속을 스쳐가는 영화만 해도 <원티드>, <매드맥스> 시리즈, <본> 시리즈, <존윅> 시리즈, <분노의 질주>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겠죠. 한국 영화 중에선 개인적으론 <내가 살인범이다> 속 차량씬도 좋아하고요. 이게 약간은 허술하고 웃음이 나는 코믹하게 표현된 추격씬이라서 생각날 때마다 돌려보곤 합니다. <베이비 드라이버> 속 추격씬과 쫀득한 음악의 조화도 좋아하고요.
최근 본 드라마 <희생자게임 시즌2>(넷플릭스 오리지널)에도 운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대만 드라마인데 시즌이 2개로 나뉘어 있어요. 시즌 1이 나왔을 때 인상 깊게 본 기억이 있어 올해 시즌 2가 나온 걸 보고 순식간에 봤습니다. 1을 무조건 봐야 이어지는 내용은 아닌데 앞 시즌을 보면 관계적인 부분을 이해하기가 조금 더 좋아요.
편지를 구독한 분 중에서 이 드라마를 보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왓챠피디아에 남은 코멘트도 몇 개 없어가지고… 감식관인 주인공 팡이런은 약간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인물로 타인의 감정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인물입니다. 남의 마음에 공감을 잘 못하고 본인의 마음도 잘 모르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시즌 1은 연달아 일어나는 살인 사건에 가족이 연루되어있다는 걸 알고 실체에 다가서는 과정을 담고 있어요. 시즌 2는 팡이런의 사수 린징루이가 담당했던 과거 사건을 재수하는 걸로 시작됩니다.
왜 갑자기 이 드라마 얘기를 꺼냈냐면, 이 드라마 속에서 가출 청소년들이 버스를 훔쳐서 여행을 가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밤에 버스를 끌고 잘도 운전합니다. 그 낭만과 객기 어드매 속 장면을 보면서 저는 혼자 내내 ‘누구한테 운전 배웠을까…’, ‘저건 1종이라 더 힘들텐데…’, ‘작은 버스라고 해도 길이가 길 텐데 차폭이랑 길이감이 오나…’하는 생각이 들어 도무지 드라마에 집중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원래 1종을 따고 싶었는데 학원에서도 주변에서도 그냥 2종 따는 게 낫다는 추천을 듣고 마음을 바꾼 케이스였거든요. 그래서 그 버스를 모는 모습을 보며 클러치를 밟고 시동을 걸었을까, 쟤네는 정차해놓고 와이퍼까지 꼼꼼하게 잘 켜놓고 있네…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mbti 검사하면 대문자 NF가 나오는 사람답게 보았습니다. 하핫.
별개로 드라마는 잔인한 부분이 다소 자주 나와서 추천해 드리기가 애매합니다. 여자 인물들이 다 아름다워서 전 즐겁게 봤지만, 호불호가 예상돼요. ’시즌 3가 나온다면 보지 않을까?’ 정도의 추천 지수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이제까지는 늘 영화 한 편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 편지는 가볍게 이런저런 얘기를 해보았어요. 다음 편지에서 면허 취득 결과를 알려드릴게요.
응달에서는 눈이 잘 녹지 않으니 이런 날엔 운전할 때도, 걸을 때도 안전하게 조심하시길 바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