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주인’은 성폭력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죠. 일전에 다큐멘터리 <나는 생존자다>와 관련한 편지에서 저의 인생에서 ‘미투’와 ‘고발’이라고 하는 지점이 떼려야 뗄 수 없다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그래서 이러한 콘텐츠를 볼 때는 스스로에게 트리거 워닝(트라우마를 자극할 수 있다는 경고)를 주는 편입니다. 심적으로 힘들 각오를 하는 거죠. 약간.. 헬스장을 가기 전에 다짐하고 나가는 것처럼요. 울 수도 있으니 손수건도 챙기고, 마치고 집에 바로 돌아오면 스트레스를 받을테니 어디어디를 들려서 정신을 좀 분산시키고 오자는 생각을 한다거나.. 하는 등의 대비책을 조금 강구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건 예상을 못 했거든요.
주인이는 아주 쾌활합니다. 윤가은 감독의 가장 대단한 지점을 관객을 어느 시점으로 고스란히 옮겨놓는다는 점이라고 생각해요. 영화가 시작한 직후 우리는 고등학생이 됩니다. 째질 듯한 웃음소리, 달려가는 발소리. 어디선가 교실의 낡은 나무 냄새와 시큰한 땀내까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어요.
주인이는 어린 시절 꼭 반에 한두 명쯤 있었던 과잉하게 활기찬 친구로, 맥 빠지는 헛소리부터 왜 저러나 싶은 헛소리까지 쉬지 않고 내뱉는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수업에 그닥 집중은 하지 않지만, 체육시간은 누구보다 열심히 듣는, 아마 체육대회를 했다면 누구보다 열과 성을 올릴 것만 같은…
반 친구 수호가 성폭력 가해자의 출소와 관련한 반대 서명을 받으면서 사건은 시작돼요. 주인이는 수호가 사용한 단어를 용납할 수 없었거든요.
‘한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고 파멸하는 성폭력 가해자의 출소를 반대한다.’라는 문구를 주인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은 그 순간 끝나는 게 아니고, 누구든 나아질 수 있으며, 남의 인생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얹지 말라는 얘기를 주인이는 계속해서 해요. 수호, 네깟 게 뭘 아냐고 얘기하면서요. 대학 좀 가려고 스펙 쌓으려고 서명받는 주제에,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런 말에 수호는 발끈하지만, 수호의 동생이 만약 피해자가 된다면, 그럼 동생의 인생은 끝이냐는 질문엔 버럭 화를 내요. 왜 그런 식으로 말하냐고요.
그러니까 사실 주인이의 말이 맞는 거죠. 수호가 본 자료가 뭐가 있겠나 싶은 생각을 저도 했거든요. 기사 몇 개, 티비 프로그램 몇 개, 그리고 시사 프로그램인 척 사건 이야기를 다루는 예능 프로 몇 개… 그 정도 보지 않았을까 싶은 시니컬한 생각이 들었거든요. 피해자를 사실 이해하지 못하니까 네 일이라고 생각하란 말에 그렇게 화를 낸 거죠.
단 한 번도 진지하게 피해자들에 대한 생각을 안 해봤으니까 주인이가 던진 ‘그럼 내 인생도 망했냐?’하는 질문에 답을 못하는 거죠. ‘수호 저 새끼, 피해자들이 모두 골방에 틀어박혀 엉엉 울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오만하고 낡은 생각이나 하고 있겠구먼…’ 그런 생각을 객석에서 했답니다. 아마 주위에 실재하고 있다는 것도 모를 거예요, 걔는.
물론, 그런 시간을 견뎌내는 피해자도 당연히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피해자성’에서 조금만 빗겨 나도 거짓이라 생각하고 진실을 규명 해주길 원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돼요. 그리고 보통 그네들이 요구하는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피해 사실을 카타르시스로 소모하고자 하는 저열한 욕망을 나타낼 때가 많고요. 어떤 일이, 언제 있었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죽고 싶었는지, 어떤 대응을 했는지. 그리고 그 사건 진술에 하나하나 말을 얹죠. 왜 술을 먹었는지,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는지, 자살시 도를 했으면 왜 실패했는지, 자살 시도를 하지 않았다면 피해가 가벼웠던 게 아닌지. ‘피해자성’이라고 하는 건 사실 실체 없는 허상인데 그 규격에 꼭 들어맞길 원해요. 그래서 목숨을 끊은 사람을 보고는 뒤늦게 혀를 끌끌 차며 목숨 아까운 줄 모른다, 젊은데 안타깝다는 무용한 얘기나 댓글로 끄적거리고 말죠. 그깟 댓글이 무슨 위로라도 되는 줄 아나…
얼마 전에 리베카 솔닛의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라는 책을 읽었어요. 책에 수영 선수 다이애나 나이애드의 이야기가 일부 나오는데 그녀는 코치로부터 당했던 성폭력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p.31) “용케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그날 내 삶은 전혀 다르게 변했습니다. (…) 내게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 추행 자체에 맞먹는 형벌이었습니다.”
(p.32) 우리는 물리적 공격과 이후의 침묵 강요를 별개의 사건으로 취급하지만, 둘은 같은 일이다. 둘 다 여성을 지워 없애려고 하는 일이다.
다이애나도, 주인이도 본인의 피해 사실을 말하지만, 두 사람은 너무 달라요. 인종, 언어부터 시작해서 발화의 방법, 형태, 주변의 반응, 구성원, 발화의 파급력 등등은 모두 달라요. 두 사람이 가진 동일성은 피해를 입었다는 것밖에 없죠. 그러니까 공통된 피해자성이라고 하는 건 존재하지가 않는 것이라는 거예요. 피해를 인정하기 싫어서, 말을 꺼내기도 힘들어서 모른 척 지나가는 사람이 있고. 집에선 울고불고 악을 질러내도 밖에선 쾌활할 수 있는 것이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죽어라 운동을 가는 사람도 있으며. 누군가는 그냥 도망가고 싶어서 시끄러운 음악 소리로 가득한 클럽을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도, 이해할 생각도 하지 못하는 저열한 인간들이 많습니다. 그네들이 인정해주 는 것이 도무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서도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과잉하게 증명하고자 하는 몸부림을 보게 되는 것이 참 씁쓸합니다. (이 당연한 얘기를 이렇게 장문으로 쓰게 되다니!)
주인이의 풀네임은 이주인 입니다. 저는 이 이름을 몇 번 읊조리다 왜 이씨일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주인인 동시에, 이주한 사람. 본래 살던 곳에서 거처를 옮긴다는 ‘이주’라는 단어가 주인이의 상황과 참 잘 맞아떨어진단 생각을 했어요. 있을 곳을 찾지 못하고, 닻을 내리지 못하는. 방황하는 인간. 괜찮은 척 생활하다, 무너지고. 무너졌다 회복하고. 끝없이 누군가를 만나며 닻을 내리고 싶어 하고 호기심은 있지만 두려움 역시 남아 있는.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하는 사람.
그러나 주인이만큼 또 재밌게 사는 사람이 없어요. 이주라는 단어가 외롭게 느껴지는 것 같다가도 또 생각해 보면…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것, 떠나는 것, 신나는 것, 흘러가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거든요.
<세계의 주인> 각본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문득 한 남학생이 주인을 툭 치고 지나간다. 가만히 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주인, 남학생을 잡으러 쫓아간다. 왁자지껄한 웃고 떠드는 아이들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주인, 세계와 하나가 된다.’
주인이는 그러니까 벌떡 일어나서 쫓아 뛰어 들어가는 사람인 거예요. 그러니까, 그의 삶은 뚜벅뚜벅 나아가는, 이주를 무서워하지 않는 주인으로 존재하는 거죠.
우리도 우리의 삶을 주인처럼 살아낼 수 있을까요? 가끔씩 울컥울컥 올라오는 분노와 슬픔이 있습니다. 세차장에서 악을 지르고 싶어질 때가 있어요. 가끔은 세계와 동떨어진 곳에서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구르고 악을 쓰고 물건을 집어 던지며 숨이 넘어가게 울다가 다시 돌아오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다시 세차장 밖으로 나오고 싶어요. 다시 세계와 하나가 되고 싶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