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보러 간 심야상영은 3편으로 구성된 세션이었는데 <브레인 데미지>-<저주의 쇼핑몰>-<테리파이어 3>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늘 이런 묶음 구성에는 어떤 큐레이션이 기반하고 있을지 궁금해하곤 했는데, 오랜만에 영화제 스태프가 되었음에도 물어보기를 까먹는 바람에 이번에도 어떤 의도로 이 세 작품이 묶였는지는 알 수 없었답니다.
저는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좀 많은 편인데 정말 자주 쓰는 것 중 하나가 ‘붐따’예요. 옛날 옛적 네이버 붐 시절에 있던 붐업(boom-up/추천), 붐따(boom-down/비추천)라는 단어를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냥 쓰고 있는 건데요, 요즘은 애매할 땐 붐중 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 영화는 차례로 붐업, 붐따, 붐따!!!!! 였습니다.
<브레인 데미지>는 1988년도에 제작된 영화인데요, 괴생물체 에일머가 주인공 브라이언과 마주하게 되면서 생긴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에일머는 파워에이드 비슷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스를 내뱉는데, 섭취하면 굉장히 약에 취한 듯 중독되는… 미친 파워에이드를 뱉어요. 브라이언은 그 주스를 얻어내기 위해 에일머의 식량(인간의 뇌) 공급을 돕게 되는데…라는 줄거리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합니다.
영화 속 에일머의 꼴이 아주 재미납니다. 남근과 똥덩어리 그 어드매의 외양을 가진 에일머는 본인이 가진 그 파란 체액을 이용해 브라이언을 지배하고자 해요. 설명을 이렇게 하니 재미있어 보이지도 않고 흥미로워 보이지도 않는데 저는 정말 몇 번이고 극장에서 깔깔 소리내 웃었어요. 내가 영화제 아니면 어디서 이런 영화를 보면서 웃을까 싶은, 그런 영화였어요. 공식 채널에서 업로드한 게 아닌 것 같아 링크를 달기 망설여지지만, 유튜브에 전체 영화가 업로드되어 있으니 흥미가 생기셨다면 추천합니다.
두 번째 영화는 <저주의 쇼핑몰>로 홍콩의 망하기 직전 쇼핑몰에서 과거의 악귀가 씐 괴물(좀비로 표상되는)을 이겨내는 부녀간의 가슴 따뜻함을 넘어 진절머리 나는 이야기입니다. 도교와 강시를 떠올리게 하는 몇 장면, 한국에선 그다지 흔하지 않은 7혼 (7개의 혼) 정도의 특징이 있지만… 부녀간의 사랑에 너무 집중했기 때문일까요? 보는 내내 ‘어우.. 질린다 정말…’하는 일종의 K-감성으로 논할 수 있을 만한 구구절절한 감정씬들이 수없이 나옵니다.
마지막 영화는 <테리파이어3>라는 영화였는데, 개인적인 취향에서는 아주 먼… 밑도 끝도 없는 고어 살육 영화였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영화를? 의미 있게? 보겠?지? 하는 의문이 자꾸 드는 영화였습니다. 과거 고어물도 꽤나 즐겨봤던 저에게도 너무 역할만큼 과잉한 영화였습니다. 의미 없는 학살, 여성의 경우에는 자궁부가 위치한 배부터 찌르는 괴물의 행태라거나.. 뭐.. 굳이 평을 달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영화였습니다.
직장동료 셋과 대학 친구 하나, 총 다섯이 들어가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마지막엔 대학 친구와 둘만이 남아 털레털레 걸어 나와 통이 튼 하늘을 마주했어요. 좋은 영화를 봤다고 할 수는 없지만, 흔하지 않은 영화를 보았다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기이한 상태로 귀가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좋았다거나 추천한다거나… 혹은 입에 올리기조차 좀 머쓱한 영화들이었지만 이런 시간을 공유한다는 그 경험 자체가 오랜만이라 즐거운 밤이었다, 싶어요.
그러고 며칠 있다가는 <28년 후>도 봤답니다. 시리즈의 첫 작인 <28일 후>를 처음 봤을 때 느낀 충격을 아직 잊지 못해서 정말 기대했는데요. 웃음이 터지는 한두 장면이 있긴 했으나 대부분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 없어서 당황하며 보다가 돌아왔습니다.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시리즈의 새로운 지점을 마주하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들어… 당혹스러우면서도 제법 유쾌했습니다.
최근 흔히 ‘장르영화’라고 하는 영화들을 연달아 보면서 도대체 이 영화들 속에 녹아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우리는 왜 과도한 장르성을 쾌감으로 받아들일까 하는 고민을 했어요.
차례대로 생각해 보면 이 네 영화들 속에는 모두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고전적 함의들이 숨어있는 듯합니다.
남근주의와 퀴어니스에 대한 고찰이 녹아있는 <브레인 데미지>, 카르마와 원한, 생과 죽음의 경계 속의 <저주의 쇼핑몰>, (죄송하지만 테리파이어에선 딱히 어떤 고찰도 느껴지지 않네요), 시리즈 내내 배신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사랑,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뛰어넘는 아들, 그러니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줄기차게 말하는 <28 0 후> 시리즈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