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투쟁과 연대, 탄압과 믿음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가정이라는 공간으로 옮겨내 보여주고 있어요.
수사판사라는 직책으로 승진하게 된 중년의 아버지 '이만'은 대규모 히잡 반대 시위에 참여한 시위자들에 대한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국가 체제를 어지럽히고, 혼란을 가지고 오는 그들이 잘못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이 어딘가 찝찝하죠. 직위가 직위인 만큼 가족들의 안전마저 위협당할 수 있다는 이유로 총까지 지급받지만, 그 안전을 위협하는 '불순분자'는 사실 멀리 있지 않습니다. 딸들은 이 시위가 왜 일어나는지 궁금해하고, 그의 친구들이 폭력 앞에서 스러지고 잡혀가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되거든요.
그리고 이 '봄'은 관객에게도 그대로 전달됩니다. 실제 당시의 시위 모습들을 푸티지로 계속 영사하는데 그걸 보다 보면 어딘가 마음이 이상합니다.
그러니까 저건 광주잖아. 라는 문장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거든요.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한강, 소년이 온다)
저는 아주 자주 이 문장을 다시 생각해요. 언젠가부터 정말 불쑥, 튀어나오는 문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란에서 사망한 마흐사 아미니(*2022년 9월, 이란에서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간 22살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사망한 사건으로 당국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목격 증언 등에서 폭력을 목격한 사람이 많고 실제 사망 원인은 폭력에 있을 것으로 추정됨)는 폭력을 마주한 것, 폭력에 짓밟힌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를 기억하는 건, 광주에서 피 흘린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게 없는거죠. 그러니까 광주에서 1세 미만 사망자가 나왔던 것을 여전히 우리는 용서할 수 없는 것처럼, 히잡을 올바르게 착용하지 않았다고 폭행당한 것을 용서할 수 없는거죠.
눈앞에서 그런 거대한 폭력을 마주하면 어떨까요. 그 두려움을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또 문득 지난 겨울이 생각나더라고요. 12월 3일 이후 첫 집회가 열리던 7일, 저희 가족은 위험하니 여의도로 가지 말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요. 민주화 시기를 거쳐온 부모님의 말에도 여의도로 향했지만, 그 발끝에는 망설임이 서렸습니다. 혹시, 하고요. 대규모 충돌이 나면 어쩌나.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게 계속 무서웠거든요.
다행히 폭력사태 없이 몇 달간 집회는 이어졌지만, 그 후에 조금 다른 것들도 눈에 더 들어왔어요. 원래도 관심은 있었지만 이제는 그 뉴스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고 해야 할까요? 지난 달이었던가요, 현대자동차의 하청업체인 이수기업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에 용역 및 관리자로 구성된 통칭 '구사대'가 폭력으로 대응하는 행태라거나... 최근까지도 이어져 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이동권 투쟁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서울교통공사와 서울시의 모습이라거나... 물론 이들의 운동과 투쟁이 다른 결로 보일 수도 있으나 본질적으로 약자의 투쟁이라는 지점에선 맞닿은 지점이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우리는 왜 투쟁할까요?
심지어 전~혀 이길 수 없어 보임에도 말이죠. 한창 학교에서 미투(metoo) 운동이 터져 나왔던 시기(*저는 미투가 한창이던 2017-8년 영화과에 재학했답니다)에 최선을 다해 운동했지만, 큰 변화를 체감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학내에서 고립을 마주하고 친구를 조금 잃었죠. 물론 운동을 같이 했던 학교 친구들과는 몇 배로 끈끈해져 아직까지 잘 지내고 있으니 잃은 것들이 아깝진 않습니다.
외롭고 힘들었던 때를 떠올리면 괜히 그랬나, 싶은 생각도 들어요. 그때 들었던 모욕적인 뒷담화(교수에게 바라는 게 있지 않겠냐는 등의 얘기부터 흔히 듣는 과잉한 예민함이다, 속내가 따로 있다, 거짓말이라더라, 그 정도 가지고 그러느냐.. 등등의)들이 아직도 문득 머릿속을 울립니다. 그래도 저는 후회하지는 않아요. 적어도 교수는 이제 재직하지 않고 적어도 이제 대외적인 공간에선 다들 말조심을 하긴 하니까요.
그리고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그 모든 과거가 '씨앗'이었다고 말합니다.
저의 본가는 경남의 한 동네에 있는데 부모님이 작은 텃밭을 꾸리고 계셔요. 자급자족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다양한 작물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감자, 양파, 마늘, 고추, 둥굴레, 호박, 미니 수박... 식물들이 자라나는 과정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아요.
씨앗을 심기 위해 땅을 고르고, 씨를 심고, 흙을 잘 덮어주죠. 물을 주고 비료를 주면서 잡초들을 솎아줍니다. 잡초들을 솎아주면서 올라오는 싹들을 잘 관찰하고 어느 정도 자라나면 작물에 따라 줄기가 휘지 않도록 지지대를 꽂아주기도 하고 과일 같은 경우에는 너무 과실 수가 많으면 오히려 잘 자라지 못해서 골라내주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을 찬찬히 거치다보면 언제 자랐나 싶을 때 결실을 맺어요. 그 과정이 짧으면 몇 달, 나무 같은 경우에는 길면 몇 년씩 걸리기도 하죠.
그러니까 이 모든 운동이 헛된 것이 절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하고 나아가고 있으니까요. 변화하고 있는지 실감나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변혁은 이루어질 거라고 그렇게 믿게 됩니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을 보면 과거 같다가, 미래 같다가, 너무나 현재 같은 순간들이 있어요. 저는 다행히 다소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그 뿌리는 경상도인지라.. (흔히 경상도+딸을 합쳐 쌍도의 딸이라 부르는 그 쌍도의 딸이 맞습니다) 친척들에게선 완전한 가부장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제사를 지낼 때 여성(며느리)들은 부엌에서 식사를 한다거나, 하는 사례들이 너무 흔했거든요. 그러면서 들어왔던 구세대의 가부장적 발언들은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저거 완전 (친척어른 000)이잖아...' 싶을 정도로요.
이만의 가정이 해체되는 과정은 한국에서도 자주 봐왔던 패턴입니다. (결말이 흔히 보이는 사례라는 건 아니지만요) 특히 한국에선 4B 운동(비연애, 비결혼, 비출산, 비성관계) 역시 젊은 페미니스트들에겐 낯선 개념이 아니라는 지점을 생각해 본다면 영화 속 가정이 갑갑하게 느껴지는 일면도 있지만 결국 닿고자 하는 자유와 해방이라는 지점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벅찬 순간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자유라는 씨앗은 이미 전세계에서 심어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딘가에선 싹이 움텄고, 어디에선 아직 발아를 기다리고 있겠죠. 씨앗이 자라나, 굳건한 땅을 밀어내고 자라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를 마치게 됩니다.
곧 장마가 시작이래요. 축축하디 축축할 장마 기간을 생각하면 한숨이 폭폭 나오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또 녹음이 푸르르게 피어날 것을 조금은 기다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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