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옛 편지 발췌...)
지난주 편지는 이해하면 용서하게 된다는 말로 시작했는데, <비밀은 없다>는 이해하지 않기를 택한 사람의 이야기예요. 이해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기를 택하면 속이 후련할까요? 3월달에 썼던 편지 ‘브레슬라우의 처형’ 편지는 복수가 대체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썼던 편지였는데 이런 문장이 있어요.
‘그런데, 정말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뭔가 이상하기 시작했어요. 복수를 하고 싶었는데, 복수란 뭘까요? 우리는 어떤 복수를 택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잘 사는 것이 복수라고 하는데, 사실 그건 전혀 통쾌하지도 신나지도 않잖아요. 물론, 만약 정말 내 손으로 복수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게 정말 뿌듯할까 싶긴 한데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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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저는 오늘 이야기드린 ‘세븐데이즈’와 ‘브레슬라우의 처형’을 생각하면 ‘사적 복수’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돼요. 사회가 가해자에게 적합한 처벌을 내리지 않을 때 개인 대 개인의 사적 복수를 우리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같은 사람이 되길 택한 것을 비난해야 할까요, 아니면 잘했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법치국가에서, 정당한 법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이 나라에서 분명 스스로도 무너질 때가 있거든요.’
<비밀은 없다> 속의 연홍은 내 손으로 복수하기를 택해요. 그렇게 범인을 찾아내고 복수하면 후련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통쾌하지 않아요. 너무 아프고 처절하고. 엉망진창인 이 현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아요. 무슨 짓을 하고 누굴 때리고 누굴 패고 누굴 찔러도 절대 딸은 돌아오지 않거든요. 아무리 괜찮은 척해도 그 뒷맛은 전혀 시원하지 않아요.
자식이 납치된 상황이 등장하는 영화의 대부분은 그냥 슬퍼요. 어찌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가 부모와 가족, 그리고 사회를 차지하면서 주인공들은 그제서야 아이의 의미를 깨닫고 가슴을 쾅쾅 치며 울어요. 마치 상우를 잃고 지선이 가슴을 내려치다 가슴에 피멍이 드는 것처럼 말이에요. (영화 ‘그놈목소리’) 하지만 그런 장면이 여기선 없어요. 물론 연홍은 슬퍼하고, 주변 사람도 슬퍼하지만 이 모든 관계와 상황이 불균질하게 얽혀 있어서 여기쯤에서 울어야 하나, 할 때쯤 갑자기 돌부리가 툭툭 튀어나옵니다.
친구라고 생각한 자혜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였고, 딸이 원래 좀 엇나가니까 실종 신고를 미루자는 이야기가 튀어나오고. 보통 대부분의 납치된 아이에게는 온건한 가정과 다정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과 달리 민진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양아치 짓’을 해온 아이였죠. 당황할 틈도 없이 아이에게 색기가 있긴 하더라 하는 선거 캠프의 위원들을 보면서 불쾌감이 들지만 진짜 얘가 엇나가서 안 들어왔나?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집에서 불안하게 전화를 기다리고 경찰들은 전화기 옆에서 위치 추적을 준비하는 장면으로 넘어가야 할 것 같을 때 연홍은 집을 나서기 시작해요. 무당을 찾아가서 조상님께 빌어보고, 가위로 손등을 찍으면서 자료 가지고 오라고 눈을 부라리고. 머리를 빗으로 쿵쿵 치면서 생각을 해보자고 읊조려요.
와, 이 엄마 제정신이 아니구나, 하는데 갑자기 ‘지니와 오기’라는 밴드의 ‘와일드 로즈 힐’이 흘러나와요.
그래서 오늘 편지는 계속해서 썼다 지우게 돼요. 다시 보면 좀 정리가 될까 했는데 여전히 이 영화는 분명히 이상한 영화 같아요. 그래서 무슨 말도 쓸 수가 없어요. 이건 분명히 연홍이 자기가 어디에 있었는지 처음으로 대면하는 이야기인데 지니와 오기의 사랑 이야기 같기도 하고. 그냥 지니와 오기의 노래 이야기 한 편 같기도 해요. 전부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어 하나로 맞출 수 없는 큐브처럼 이 영화에는 온갖 불편한 이야기들이 다 들어가 있어요.
커터칼날에 손이 베이는 아이와 학부형과 눈이 맞아 섹스하는 선생, 클럽에서 난동을 부리는 중학생, 선거를 위해 출신지를 속이는 아내, 권력욕은 있지만 한평생 꿈이 정치인이 아니라 영부인이었던 아내, 1억과 살인청부업자를 준비하는 정치인, 손등에 가위를 꽂는 엄마, 도청을 감행하는 상대 진영과 줄타면서 간보는 선거 캠프, 가수한다고 설치는 너 때문에 애가 엇나간다고 말하면서 목을 조르는 남편, 뒷좌석에 똥을 싣고 다니는 똥차 운전기사의 딸, 남편 얼굴에 랩을 칭창 감고 죽일 듯 때리다 죽게 내버려두면 지는 거라고 풀어주는 아내, 죽은 딸의 사진을 찍어 인증샷을 남기는 청부업자, 운전을 하는 중학생, 옷 속에 들어 있는 담배, 함께 누워서 약간은 웃으면서 파멸의 버튼을 눌리는 것, 선생에게 협박으로 시험지를 뜯어내는 딸, 따뜻하고 다정한 아지트, 아지트에서 만들어지는 기괴한 노래. 이 모든 게 얼기설기 엮여 있어요.
비밀은 없다면서 비밀밖에 없어요. 이 영화의 제목은 <비밀은 없다>가 아니라 <비밀(밖에)는없다>가 되는 게 맞을 정도로요. 그런데 정말 웃긴 건, 결국 비밀은 없다는 거죠.
그렇게 이 영화가 내달리는 끝에 존재하는 건 ‘엄마는 멍청해서 내가 지켜줘야 한다고 했어요.’라는 이 한마디인데 그게 너무 이상하잖아요. 그리고 그 말이 참을 수 없게 슬픈 것도 너무 이상했어요. 서로를 지키려는 두 사람이 사실은 서로 아무것도 모르는데, 둘 다 서로가 너무 끔찍하게도 소중하다는 사실 자체가요. 이상하고 슬프고 이해가지 않고 이해가 돼요.
엄마는 이 모습을 절대 모르겠지만, 그리고 몰라야 하지만 엄마를 끔찍하게 아끼기 때문에 누군가를 향해서 ‘이 개같은 씨발년아 미친년아’를 외칠 수 있다는 게. 그리고 그 결과가 돌고 돌아서 둘 다의 목을 조르고 죽인다는 것을요.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질투하고. 질투해서 사랑하고. 하나도 아름답지 않은 날것의 감정들이 충돌하고 부딪히는데 우리가 흔히 보던 정치인의 선거에 얽힌 이야기가 아니라 이 두 여자의 감정을 따라가기만 해도 영화가 된다는 것도 너무 신기하죠. 심지어 한 여자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데 감정으로 존재한다는 게 얼마나 신기한가요?
연홍은 종찬을 계속 살게 하고. 혼자 산에 누워요. 아직도 갈비뼈는 아프지만 그 정도 고통은 연홍을 막지 못해요. 꾸역꾸역 산에 올라가면 미옥이 가져다 놓은 민진의 흔적들이 있어요. 몰랐던 딸의 모습인데 그곳에 놓인 것들을 보면 또 딸이 보여요. 다시금 산을 찾아온 미옥을 보면서 연홍은 민진을 봐요. 그리고 영화가 5분도 안 남은 시점에 연홍은 정말 자기가 묻고 싶었던 그 질문을 꺼내요. ‘우리 딸이 제 엄마는 좋다 하디?’하고요.
아무리 많은 이야기가 이 영화를 지나가더라도 연홍이 붙잡았던, 그리고 피하고 싶었던 질문은 이거예요. 그냥 이 질문. 내가 몰랐던 딸의 모습을 이렇게 많이 봤는데 내가 믿고 살아가던 그 한 질문마저 틀렸으면 어떻게 하지? 내 딸이 사실은 나를 싫어했으면 어떻게 하지? 투쟁하고 부딪히면서 복수하고 범인을 알아낼 때는 단 한 방울도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 그 후에 드디어 찾아오는 혼자만의 시간에 성큼 다가온 거예요. 불안의 밑바닥을 직시하고 그 답을 알아냈을 때 그제서야 눈물이 나는 거예요. 비밀이 없어진 그 순간,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이려고 했던 <행복이 가득한 집>으로 죽은 민진이 돌아와요. 물론 그 집엔 더 이상 종찬도 없고, 사실 민진이도 없고. 연홍도 그 집에 들어갈 수는 없게 되었지만, 연홍과 민진은 그 집 앞 그네에서 만나게 되는 거죠. 그 그네가 있는 정원이 와일드 로즈 힐인지, 그냥 이름 모를 산인지. 행복한 집 앞인지 모르지만. 그리고 우리 딸은 우리가 생각한 것만큼 착한 게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생각한 것보다 더 엄마를 사랑했다는 그런 이상한 끝맺음입니다.
민진이는 엄마가 멍청하다고 했는데, 왜인지 영화를 보고 나면 나도 멍청해지는 기분이에요. 친절했던 금자씨는 늦어버렸고, 멍청했던 연홍도 늦어버렸어요. 친절해도 멍청한 강한 약자들의 폭주를 보고 있으면 무키무키만만수의 노래를 처음 들었던 기분이 되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 생각을 멈출 수가 없게돼요.
(후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