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 다닌지 3년차가 되었고 팀장이라는 이름을 단 것도 1년이 넘었답니다. 물론 운이 좋았던 케이스라 아주 빠르게 직급을 달았습니다. 대학 시절의 저에게 너는 2024년에 소품팀장이 되어 네 밑에 너덧명을 데리고 다니며 일을 가르치고 있을 것이란다, 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영화 평론가 이동진의 블로그 소개글이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인데 제 삶이 딱 그래요. 하루하루 정말 부단히 노력하고 살고 있는데 그 삶이 흘러가는 방향이라는 것이 제가 어릴 때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르더라고요.
저는 사실 30대 초만 되어도 번듯한 직장을 가진 여유로운 커리어우먼이 될 줄 알았어요. 펼쳐진 야경을 바라보며 위스키 한 잔을 하며 잠드는 그런 삶을 살 줄 알았죠. 지금 삶의 모습은 불안정한 직장 속 여유라곤 없이 땀 범벅이 돼 후달리는 몸을 이끌고 집에 와 대충 씻고 위스키 한 잔을 급히 들이키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위스키는 마실 수 있다는 게 기쁜 일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요. 하핫. 사실 위스키보다는 보통은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잠에 들곤 합니다. 술을 먹고 자면 얕게 자서 일어나기가 수월하거든요. 다음 날도 새벽같이 일어나서 나가야하니 술을 먹는 게 나쁜 선택은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현장을 다니다 보면 많은 일이 벌어져요. 매일매일이 사건사고입니다. 현장에서 갑작스러운 요청이 들어오기도하고, 로케이션이 헌팅을 다닐 때와 바뀌어 있을 때도 있죠. 그런 순간순간은 스트레스와 속쓰림을 가져다주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 하나. 그 하나가 사람을 버티게 해요. 그것은 대본이기도, 배우이기도, 현장에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아주 작은 하나가 끝까지 누군가를 버티게 해요. 그런데 동시에 또 어떤 하나가 무너지는 순간 버티기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사람은 모두 평등하고 위아래가 구분될 수 없다는 아주 당연한 사실이 저에게는 아주 중요해요. 어떤 일을 하건, 어떤 직위에 있든 그것이 권력이 될 수도 없거니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죠. 소품이라는 파트는 소도구로 불리기도 해요. 소품이라는 단어는 한자어는 작을 소에 물건 품자를 쓰는(小品), 규모가 작은 예술 작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소(小)라는 것이 역할의 대중소를 나눈 것도 아니거니와 누군가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참 많은 사람들이 소품을 허드렛일로 생각하곤 해요. 장비는 비싼 것, 좋은 것. 그러니 대우를 받는 것. 그 외의 파트는 조금은 덜 중요한 것, 이라고 형태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참 많더라고요.
그런데 다들 모르는 게 있어요. 돈으로만 따지더라도 사실 가구는 엄청나게 비싸다는 것을… 고급 저택에 들어가는 6인 집무 테이블 소파는 3천만원이 훌쩍 넘고, 책상 하나가 몇 천만원을 호가하는 제품이라는 것 같은 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공간을 세팅하는데 7-800만원을 호가해도 이런 금액은 자주 흐려지고 보이지 않게 됩니다. 물론 돈이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품팀의 입장에선 과연 장비만 비싸냐 하는 한탄을 내뱉게 되곤 하는거죠. 장비 세팅에 시간이 걸리는 것은 용인되고 소품팀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시간들에 대한 고민 같은 것들이 들곤 합니다.
이런 태도를 마주하는 순간순간들이 쌓이면서 어떤 마음들이 고갈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소품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소품 그 자체가 되는 기분. 사람을 소품으로, 그것을 넘어 소모품으로 대하고 있다고 체감할 때 스쳐가는 얕은 모멸감. 그런 것들이 무력감과 탈력감을 주곤 합니다.
이것이 자기연민인지 아닌지 몇 달동안 고민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를 방치하는 것이 자기학대라는 결론이 나왔어요.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와 별개로 말이죠.
사실 소품이란 일을 너무 사랑해서 이 파트를 시작했던 건 아니었어요. 돈이 필요했고 마침 구인공고를 보게 된 거죠. 현장도 궁금했겠다, 현장이 궁금해서 서울을 온 건데 해 봐야지 싶어서 시작했던 거죠. 일을 시작해서도 너무 좋고 그렇진 않았어요. 어라, 근데 이게 재미있더라고요. 그러다 이 일을 꽤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소품일을 처음 시작한 친구들에게 자주 해주는 이야기가 있어요. 공간을 디자인하고 그래픽을 만드는 일은 0에서 1을 쌓아가는 과정이다. 온전한 창작에 가깝다. 소품일은 그것과 조금 다르다. 소품이라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던 구상을 현실로 옮겨내는 과정이다. 우리의 손끝에서 공간이 완성된다. 같은 사무실이어도 흰 색 계열을 놓으면 깔끔하고 젊은 느낌을, 우드톤을 두면 연식이 있어 보이는, 중역 세트를 갖춰 가죽 느낌을 사용하면 직급이 있는 사람의 사무실로 보이게 만들 수 있다. 앞으로 명찰 같은 걸 제작할 때 자주 물어볼 거다. 어떤 색의 명찰 끈을 쓰고 싶냐고. 재고엔 검정색도, 회색도, 파랑색도, 초록색도 있는데 이 대본 속 이 기업이 어떤 색을 쓰는 게 어울릴 지 생각해봐라. 그리고 그걸 인물들에게 직접 걸어주면서 내가 이 화면을 만들어내는 재미를 느꼈으면 좋겠다. 시작은 명찰 줄 색이겠지만 그게 점점 확장돼서 어떨 땐 빈 벽 앞에 포스터를 붙이는 게 나을지, 화분을 두는 게 나을지 점점 보일 거고 그런 재미가 붙으면 이 일이 재미있어질 거라고요.
물론 이런 노력을 누군가가 알아 주지는 않습니다. 사실 누가 무슨 색 목줄을 하고 있는지 시청자는 거의 절대 모르거든요.하지만 정말 거기서부터가 시작입니다. 극중 날짜에 맞춰서 혼자만의 재미로 책상 세팅을 바꾸고 앵글에 맞춰서 갓등을 살짝씩 돌려주고… 그런 재미가 붙으면 신이 나요. 물론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런 재미를 하나씩 찾아가다보면 좀 더 즐겁게 일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습니다.
내가 이 일을 좋아하고 있구나, 를 새삼 느꼈던 건 출근이 싫었던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에요. 저는 서울에 살고 사무실은 일산이라 출퇴근이 4시간 넘게 걸렸는데 그 생활을 22년 중간부터 했어요. 그 시간마저 꽤나 즐거웠다는 것만 봐도 이 일을 꽤 좋아하는 걸 실감할 수 있었죠. 그런데 최근 처음으로 출근하기가 너무 싫더라구요. 정말 어딘가로 끌려가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날들이었어요. 이유 없이 치밀어오르는 우울과 분노에 잠식당해 일하는 몇달이었습니다. 현장에서도 웃음이 나지 않을 때, 사라지고 싶을 때, 언성을 높이고 고함을 치는 사람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릴 때. 그런 순간순간들을 보내며 조금씩 마모된 것 같아요.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 없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더 늦기 전에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개인적인 사정도 있어 어떻게보면 겸사겸사 떠나게 된 거죠.
이제까지 늘 프리부터 촬영 마무리까지 자리를 지켰는데 중도하차라고 하는 것이 찝찝하고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예전에 친구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현장에 있으면 현장에 매몰된다고. 조금만 바깥으로 나가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 다수인데 현장에 있으면 누가 어느 작품에 들어갔다더라, 뭐가 투자를 받았다더라, 그 작가가, 그 감독이, 그 피디가… 그런 것들이 가장 중요한 가치처럼 느껴지게 돼 벗어나기 힘들었다고요. 현장을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현실은 평온합니다. 아무런 큰 일이 나지 않고 일상이 흘러갑니다. 오늘도 해는 뜨겁고 중간에 비가 내리고, 밤이 되면 추워지고. 그냥 그렇게 하루가 흘러가요. 이상한 일입니다. 벗어나면 큰 일이 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받아들이는 기분이 이상합니다.
새로 편지를 시작한다면서 내용이 너무 우울하죠? 이 푸념 같은 편지를 마무리하는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왜 이 일을 좋아했는지를 쓰다보니 씁쓸합니다. 이 일을 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동시에 그만두기로 마음 먹은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그리워할 것 같습니다. 저는 앞으로 뭘 하고 살게 될까요? 우선은 한동안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보려 합니다.
편지를 읽는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고민이 많았던 이전에 편지를 썼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 기간에 편지를 써볼까 합니다.
예전에는 아름다운 영화 같은 하루가 되시라는 문장으로 마치곤 했는데요. 이젠 아름다운 영화가 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편지는 유독 길었는데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무사히 하루의 마무리를 보내시길 바라요.
p.s. 하단부 링크를 통해서 편지로 써주었으면 하는 영화를 신청할 수도, 저에게 간단한 메시지를 남기실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