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후반부가 되어서야 타자를 두드리게 됩니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점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하핫. 전 이제쯤이면 봄 인사를 건넬 때가 된 것 같은데 여지없이 찾아온 꽃샘추위에 당황하며 옷장 정리를 미루게 되는 날을 보내고 있어요.
다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이제쯤이면 즐거운 소식이 있을까 했는데 여전히 불안함이 남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네요. 영화 값이 14,000원을 웃도는 요즘… 영화관을 갈 일이 잘 없는데 최근 <서브스턴스>를 보고 왔어요. 완전히 막차를 탄 셈인데요. 봐야지, 봐야지… 생각만하다 극장에서 내려가기 직전에야 다급히 보게 되었습니다.
<서브스턴스>는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요. 젊음을 딱히.. 그렇게까진 갈망하지 않고 현재를 적당히 잘 살아가던 엘리자베스가 직장을 잃고 ‘더 나은 나’를 (말 그대로) 낳을 수 있다는 약물 ‘서브스턴스’를 맞게 되면서 생기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일을 잃은 엘리자베스는 집에 돌아와 격분합니다. 그런 엘리자베스에게 찾아온 것이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입니다. 이걸 맞으면 나의 모든 좋은 점만을 담은 내가 다시 태어나고 ‘새로운 나’와 일주일씩 번갈아 가며 시간을 공유하게 된다는 거죠.
이 약물의 가장 비극적인 지점은 두 ‘나’는 시간을 공유하지만, 기억을 공유할 수는 없다는 지점이에요. 결국 하나라고 할지언정 서로가 서로의 육체에 소유권을 주장하게 될 것임은 뻔하기에 예상된 비극이 휘몰아치게 됩니다.
<서브스턴스>를 장르적으로 따지자면 ‘바디호러’ 장르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바디호러’란 말 그대로 신체를 훼손하거나 변형하는 것에서 오는 그 기괴함을 공포의 근간으로 삼는 장르입니다. 저는 고어, 호러 등등… 자극적인 장르라면 가리지 않고 찾아보는 편이라… 이런 장르 역시 즐기는 편이어서 <서브스턴스>를 보러 갈 때에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향했답니다.
장르적 쾌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답은 사실 ‘개그는 반복’이라는 말처럼… 속된 말로 ‘뇌절’에서 온다고 저는 생각해요. 과잉한 것들을 반복해서 더 과잉생산 해버리는 순간, 거기서 장르적 쾌감이 터진다고요. 그런 의미에서 <서브스턴스>는 아주 훌륭하게 n절까지 해냅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끝없이 뚝심 있게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는데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극장에서 깔깔 웃을 뻔 했어요. 장르적으로 내달리는 길에서 저마저도 숨이 차 웃음이 나오는 거죠. 어린이들은 달리기를 하면 자기도 모르게 웃잖아요. 그런 마음이 들어 극장에서 활짝 웃어버리고 말았답니다. 폭발하는 이미지가 주는 쾌감 같은 게 있었거든요. 말 그대로 폭발하는 순간. 오히려 숨통이 트입니다. 엘리자베스가 평생에 걸쳐서 받아온 스트레스와 평생에 걸쳐 내지르고 싶던 비명이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에서 오는 후련함. 미련도 남지 않게 모든 감정을 쏟아내고 난 후에 찾아오는 개운함 같은 것이 있어 너무나 즐거웠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바디호러 장르의 영화를 꼽자면 역시 <에일리언>과 <티탄>인데요. <에일리언>은 스트레스받는 것도 없이 그냥 ‘엄지 척, 짱 재밌다’ 하고 봤어요. 에일리언이 주는 공포의 근간에는 출산이라는 공포. 살을 찢고 튀어나오는 정체 모를 생명, 이라는 지점이 도사리고 있지만 그 몸이 내 몸은 아닌지라… ‘그’에게 닥친 공포를 즐길 수 있었답니다. 반면 <티탄>은 여성 감독의, 여성 주연의 바디호러라 그랬을까요? 분명 <에일리언>도 <티탄>도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지만 <티탄>을 보는 과정에서 조금 더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티탄>은 보는 내내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쉬고. ‘아니 왜 저래’라는 말이 저도 모르게 자꾸 터져나와서 보는 내내 스트레스를 받았던 반면, 보고 나서는 뒤끝이 없었는데요. <서브스턴스>는 다른 의미로 현실감 있어서 그런지 영화 자체를 보면서는 깔깔 웃었지만, 극장을 나오면서부터 입맛이 씁쓸해지기 시작했어요.
당연히 이 이야기는 참으로 슬픈 이야기입니다. 기억을 공유하지도 못하는, 내 등을 뜯고 자란 나의 분신이 나를 해하더라도, 그 몸이 누릴 영광이 그리워서 그것을 떨쳐내지도 못하고 더 쇠퇴하게 되는 과정을 보면 숨이 콱. 막히는 기분도 듭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일상이 <서브스턴스>와 뭐가 다를까요? |